가가멜이 된 스머프, 그리고 삶의 시
일상 · 약 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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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멜과 아즈라엘들이 힘없는 스머프들을 재료로 금을 만들어낸다. 자연을 훼손하여 금을 캔다. 어릴 적 만화 속 악당이었던 가가멜은, 어른이 되어 다시 보니 우리 사회의 작동 방식을 너무도 정확히 닮아 있었다. 누군가는 더 약한 누군가를, 그리고 말 없는 자연을 갈아 넣어 금을 만든다. 문제는 그 풍경이 더 이상 만화가 아니라는 데 있다.
가가멜과 아즈라엘, 금을 좇는 사회
가가멜의 욕망은 단순하다. 금. 그는 스머프 한 줌이면 금을 만들 수 있다고 믿고, 그 믿음을 위해 숲을 헤집고 덫을 놓는다. 아즈라엘은 그 옆에서 충실히 사냥을 돕는다. 이 구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오늘의 경제가 작동하는 방식과 놀랍도록 겹친다. 힘의 우위에 선 쪽이 힘없는 존재를 ‘재료’로 환산하고, 자연을 ‘자원’으로만 바라보며 금으로 바꾼다.
여기까지는 차라리 익숙한 비판이다. 강자가 약자를 착취한다는 이야기, 성장을 위해 자연을 훼손한다는 이야기. 우리는 이미 그런 구조를 안다고 믿는다. 그러나 진짜 섬뜩한 지점은 그다음에 있다.
스머프가 스스로를 가가멜이라 믿을 때
놀라운 것은, 스머프들이 스스로를 가가멜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잡아먹히는 쪽이 잡아먹는 쪽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가가멜의 탈을 쓴 스머프들뿐이다. 자신도 언젠가 금을 캐는 쪽에 설 수 있다고 믿으며, 그 믿음 하나로 기꺼이 덫을 향해 걸어간다.
이 전도된 욕망은 다음 세대로 고스란히 대물림된다. 하다못해 아이들에게까지 영어의 굴레를 씌워 예비 노예로 제조해낼 생각뿐이라니. 물론 언어를 배우는 일 자체가 굴레는 아니다. 다만 그것이 ‘더 비싸게 팔릴 나’를 만들기 위한 조기 훈련으로만 소비될 때, 배움은 호기심이 아니라 시장 가치가 된다. 아이는 세상을 사랑하는 법보다 세상에서 값을 매겨지는 법을 먼저 익힌다. 스머프가 스머프를 가가멜로 길러내는 순환, 그 안에서 우리는 모두 조금씩 가가멜이 되어 간다.
자연을 노래하던 선순환은 어디로 갔을까
한때 사람은 자연을 노래했다. 계절을 읽고, 흙을 만지고, 삶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선순환이 있었다. 씨를 뿌리면 거두고, 거둔 것을 나누고, 다시 땅으로 돌려보내는 리듬. 그 안에서 사람은 자신이 거대한 생명의 순환 가운데 잠시 머무는 존재임을 알았다.
지금 그 선순환은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는 자연을 노래하는 대신 가격을 매기고, 삶을 생각하는 대신 성과를 계산한다. 금을 향한 속도가 빨라질수록, 삶이라는 단어는 점점 더 멀고 추상적인 것이 되어 간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걷고 싶어졌다. 금이 아니라 삶을, 효율이 아니라 의미를 다시 묻는 쪽으로.
조재도의 시에서 삶의 의미를 다시 줍는다
그럴 때 나는 시를 찾는다. 요즘은 조재도 시인의 시가 읽고 싶다. 시집 『좋은 날에 우는 사람』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래서다. 그의 시 「유물론」에서 비로소 삶의 의미를 다시 더듬을 수 있을 것 같다.
「유물론」은 죽은 어머니를 고추밭에 묻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분해되어 흙이 되고, 그 흙이 다시 풋고추로 돌아와 식탁에 오른다. 어머니의 살을 먹고, 어머니를 움켜쥐고 있던 흙의 손을 먹으며, 화자는 “얼얼하구나, 오냐, 살 수 있겠다”고 말한다. 가가멜이 자연을 금으로 바꾸는 세계와 정반대편에, 죽음마저 생명으로 되돌리는 이 거대한 순환이 있다. 물질을 노래하되 그것을 삶으로 끌어올리는 것 —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선순환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아래에 그 시를 옮겨 둔다.
죽은 어머니를 고추밭에 묻었다
한 길 땅 속 허공에 반듯이 누워
분해되어 가는 어머니
푸른 햇살 되퉁기는 풋고추에 몸을 실어
올여름 우리에게 싱싱하게 오신다
생명은 이렇게 한 치 건너 두 치
보이지 않는 길 따라
목숨을 싸고 돈다
고추장에 된장 듬뿍 찍어
와삭, 어머니를 먹는다
어머니 살을 먹는다
어머니를 움켜쥐고 있는 흙의 손을 먹는다
얼얼하구나, 오냐, 살 수 있겠다― 조재도, 「유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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