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서 관세는 1930년대 무역 붕괴의 주범이 아니었다고 정리했다. 그렇다면 세계는 왜 블록으로 갈라졌나.
흔한 설명은 이렇다. 미국이 관세를 올렸다 → 영국이 제국 안에 울타리를 쳤다 → 배제된 독일과 일본이 자기 자원권을 만들려고 팽창했다. 깔끔한 도미노다.
그런데 날짜를 하나씩 맞춰 보면 이 도미노는 순서가 맞지 않는다. 일본이 만주를 친 것은 오타와 회의보다 열 달 앞섰고, 독일이 자립경제의 기반을 깐 것은 히틀러가 집권하기도 전이었다. 영국이 자유무역을 접은 것도 오타와가 아니라 그보다 넉 달 전이다.
물론 블록 하나하나는 분명 설계됐다. 오타와는 한 달간 협상한 결과였고, 뒤에서 볼 우가키 총독의 일선만 분업표도 샤흐트의 신계획도 명백한 설계다. 그런데 세계가 블록으로 쪼개진 상태 자체를 설계한 사람은 없다. 각자가 각자의 위기에 대응해 각자의 울타리를 그린 결과가 쌓여서, 어느 순간 세계가 블록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 차이가 왜 중요한지는 3편에서 분명해진다.
Photo by The New York Public Library on Unsplash
1931년 9월, 한 주 사이에 벌어진 일
먼저 날짜를 나란히 놓아 보자.
| 날짜 | 사건 |
|---|---|
| 1930년 6월 17일 | 미국, 스무트-홀리 관세법 서명 |
| 1931년 5월 | 오스트리아 크레디트안슈탈트 은행 파산 |
| 1931년 7월 | 독일 다나트방크 파산 → 브뤼닝 내각, 외환통제 도입 |
| 1931년 9월 18일 | 일본 관동군, 만주사변 개시 |
| 1931년 9월 19일 | 영국, 금본위제 이탈 |
| 1931년 11월 20일 | 영국, 이상수입관세법 — 최대 100% 관세 부과 권한 |
| 1932년 3월 1일 | 영국, 수입관세법 시행 — 일반관세 10% (자치령은 11월 15일까지 면제) |
| 1932년 7월 21일~8월 18일 | 캐나다 오타와, 영연방 경제회의 (협정 서명 8월 20일) |
| 1933년 1월 30일 | 히틀러 총리 취임 |
| 1933년 6월 12일~7월 27일 | 런던 세계경제회의 (66개국) — 결렬 |
| 1934년 9월 | 독일, 샤흐트의 ‘신계획’ |
| 1936년 | 독일 4개년 계획 |
출처: Gold standard · Import Duties Act 1932 · British Empire Economic Conference · London Economic Conference, Wikipedia
이 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1931년 9월 18일과 19일이다. 일본이 만주로 들어간 바로 다음 날, 영국이 금본위제를 버렸다. 두 사건은 직접적 인과관계가 없다. 그런데 같은 주에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그해의 압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말해 준다.
그리고 이 표는 흔한 서술 하나를 무너뜨린다. 오타와 회의(1932년 7월)가 일본 팽창의 출발점이었다는 설명은 시간이 맞지 않는다. 일본은 오타와 열 달 전에 이미 만주에 들어가 있었다. 오타와 이후의 블록화가 일본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1930년대 중반 영연방 시장에서 일본 제품에 대한 제한이 강화되며 통상 마찰이 이어졌고, 그것이 자립 노선을 굳히는 쪽으로 작용한 것은 맞다. 다만 블록화는 이미 시작된 경로를 굳혔지, 그 경로를 만들지는 않았다.
독일의 자립경제는 히틀러보다 먼저 시작됐다
같은 종류의 오해가 독일에도 있다. 오타와에서 배제당한 독일이 자립경제(아우타르키)로 돌아섰다는 서술이다.
역시 순서가 맞지 않는다.
1931년 5월 오스트리아의 크레디트안슈탈트가 무너졌다. 중부 유럽 최대 은행 중 하나였고, 그 파산은 곧바로 독일로 번졌다. 7월에는 독일의 다나트방크(다름슈타트-국립은행)가 무너졌다. 은행이 무너지자 브뤼닝 내각은 급하게 외환통제를 도입했다. 마르크를 함부로 밖으로 내보내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이것이 결정적이다. 외환통제는 단순한 금융 응급조치가 아니었다. 자립경제를 굴리려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인프라였다. 외환을 국가가 배급하면, 무엇을 얼마나 수입할지를 국가가 정한다는 뜻이 된다. 시장이 아니라 정부가 무역을 결정하는 체제가 이때 깔렸다.
히틀러가 총리가 된 것은 그로부터 1년 반 뒤인 1933년 1월이다. 나치 경제 관료들이 한 일은 새 체제를 발명한 게 아니라, 이미 깔려 있던 통제 장치를 목적을 바꿔 사용한 것이었다. 1934년 9월 얄마르 샤흐트의 이른바 ‘신계획’은 이 외환 배급을 원자재 확보에 맞춰 재편했다. 발칸·남미 국가들과 맺은 협정의 구조는 이랬다. 독일은 원자재를 계속 받되 태환 외환이 아니라 마르크로 지불하고, 상대국은 그 마르크를 독일 상품 구매에만 쓸 수 있었다. 사실상 구매처가 독일로 묶이는 양자 청산 구조다. 1936년 4개년 계획은 그 연장선이다.
즉 오타와는 이 흐름을 강화한 요인이었지, 시작점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구분은 3편에서 다룰 질문 — “되돌릴 수 있는가” — 에 직접 연결된다. 발명된 것은 되돌리기 쉽지만, 위기 대응으로 깔린 인프라는 그것을 만든 위기가 지나가도 남는다.
1932년 오타와, 그런데 영국은 이미 문을 닫은 뒤였다
그렇다고 오타와가 사소했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상징적 무게로만 따지면 이 시기 최대 사건이다. 다만 여기서도 순서를 정확히 해야 한다.
영국이 자유무역을 접은 것은 오타와가 아니라 그 전이다. 1931년 11월 20일 이상수입관세법으로 최대 100%까지 매길 권한을 만들었고, 1932년 2월 29일 국왕 재가를 거쳐 3월 1일 수입관세법을 시행하며 일반관세 10%를 걸었다. 이때 자치령·인도·남로디지아만 그해 11월 15일까지 면제했는데, 그 면제 시한이 바로 오타와에서 제국특혜를 협상하라고 만들어 둔 기한이었다. 오타와는 결단의 순간이 아니라, 이미 통과된 법 위에 제국이라는 지붕을 씌우는 회의였다.
회의는 1932년 7월 21일부터 8월 18일까지 캐나다 오타와 국회의사당에서 열렸고, 협정은 8월 20일 서명됐다. 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인도·남아프리카·아일랜드 자유국·뉴펀들랜드·남로디지아 등 9개 대표단이 모였다.
결과는 최소 5년짜리 양자 협정 묶음이었고, 이것이 제국특혜관세(Imperial Preference) 체제가 됐다. 원칙은 감출 생각도 없이 노골적이었다.
“본국 생산자 먼저, 제국 생산자 다음, 외국 생산자 마지막”
제국 안에서는 관세를 낮추고 밖에는 높게 매기는 구조다. 1846년 곡물법 폐지 이래 80여 년 자유무역을 국가 정체성으로 삼아온 영국이 그 원칙을 완전히 접은 것이다.
국내 정치에서도 대가를 치렀다. 거국내각 안에서 허버트 새뮤얼이 이끄는 자유당계가 이 보호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해 내각을 떠났다. 자유무역은 영국에서 정책이 아니라 신념이었고, 그 신념이 깨진 것이다.
바깥에서 보기에 이 장면의 의미는 하나였다. 가장 자유무역을 신봉하던 나라조차 문을 닫는다면, 이제 각자도생 말고 답이 없다.
세계가 갈라진 모양
1930년대 중반의 세계 지도는 이렇게 생겼다.
| 블록 | 중심 | 특징 |
|---|---|---|
| 파운드권(스털링 블록) | 영국·자치령 | 파운드에 통화 연동, 제국특혜관세 |
| 금블록 | 프랑스·네덜란드·스위스·벨기에 | 금본위제 고수, 1935~36년까지 잔류 |
| 청산협정권 | 독일 | 독일 상품 구매로 묶인 마르크 계정으로 결제, 동유럽·남미로 확장 |
| 엔블록 | 일본·조선·대만·만주 | 엔 통화권, 역할 분담형 분업 |
되먹임 고리 — 각자에게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블록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무서운 것은, 어느 단계에서도 누군가 비합리적으로 굴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국 의회가 농민 표를 의식해 관세를 올린 것은 국내 정치적으로 합리적이었다. 영국이 금을 버리고 제국 안에서 시장을 확보한 것은 위기 대응으로 합리적이었다. 독일이 은행 위기에 외환통제를 건 것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 합리적 선택들이 서로를 강화했다는 점이다.
- 한 나라가 문을 닫으면 다른 나라의 수출 시장이 줄어든다
- 수출이 줄면 그 나라도 문을 닫는 편이 유리해진다
- 문이 닫힐수록 “우리가 필요한 것은 우리 권역 안에서 확보해야 한다”는 판단이 강해진다
- 그 판단이 권역을 넓히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 그러면 다른 나라들은 더 단단히 문을 닫는다
각 단계에서 아무도 세계 무역을 파괴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섯 단계를 돌고 나면 세계 무역이 파괴돼 있다. 각자의 설계를 합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블록 하나하나는 설계였는데 블록 체제는 축적인 이유가 여기 있다.
그리고 축적된 것에는 되돌리는 버튼이 없다. 5번 단계까지 온 나라에게 “1번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해 봐야, 그 나라 입장에서는 자기만 무장해제하는 셈이 된다.
축적을 끊을 기회가 한 번 있기는 했다. 1933년 6월 12일부터 7월 27일까지 66개국이 런던에 모여 통화 안정과 무역 회복을 논의한 세계경제회의다. 그러나 7월 3일 루스벨트가 “환율보다 국내 경제 회복이 먼저”라는 이른바 폭탄 선언을 보내면서 회의는 사실상 끝났다. 다자 협조의 문을 닫은 것이 블록에서 배제된 쪽이 아니라 아직 여유가 있던 미국이었다는 점은, 이 시기를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누기 어렵게 만든다.
이미지: Arthur S. Siegel(1943년,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조선 — 공장은 블록보다 먼저 들어섰다
이 시기가 한국 독자에게 남의 이야기가 아닌 이유가 있는데, 흔히 알려진 것보다 순서가 조금 다르다.
함경남도 흥남의 대규모 화학공업이 시작된 것은 1927년이다. 일본질소비료의 노구치 시타가우가 조선질소비료를 세우고, 장진강·부전강 수력발전소를 함께 지었다. 이후 600만 평 부지에 질소비료·경화유·화약·카바이드·가성소다·소다회 공장과 철강·아연 단지가 올라갔다.
오타와 회의보다 5년 앞선다. 만주사변보다도 4년 앞선다. 그러니까 조선의 공업화 자체가 블록경제 때문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값싼 수력 전력과 값싼 노동력, 그리고 본국보다 느슨한 규제를 찾아온 자본의 논리가 먼저였다.
블록이 한 일은 시작이 아니라 배정이었다.
1931년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우가키 가즈시게는 일본·조선·만주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는 이른바 ‘일선만(日鮮滿) 블록’을 구상했다. 그 안에서 각 지역은 역할을 나눠 가졌다.
| 지역 | 배정된 역할 |
|---|---|
| 일본 | 정밀공업 |
| 조선 | 기초공업(粗工業) |
| 만주 | 농업·원료 |
이미 서 있던 흥남의 공장들은 이 분업표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성격이 한 번 더 바뀐다. 비료를 만들던 설비가 화약과 항공연료를 만들기 시작했고, 조선 전체가 이른바 병참기지로 재정의됐다.
여기서 짚을 대목은 이것이다. 블록 안의 약한 참여자는 자기 위치를 스스로 고르지 못한다. 조선은 공업화를 원했느냐 아니냐를 물어본 적도 없이 ‘기초공업 지대’라는 칸을 받았고, 전쟁이 시작되자 그 칸의 내용물이 바뀌었다.
이 공장들이 해방 후 한국 경제에 무엇을 남겼는가는 ‘식민지 근대화’를 둘러싼 오랜 논쟁의 주제이고, 이 글은 거기에 답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하나다. 블록의 분업표에서 어느 칸을 받을지를, 그 칸에 들어간 쪽이 정하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다.
그래서 2편이 남기는 것
세 가지다.
첫째, 순서를 정확히 봐야 한다. 만주사변은 오타와보다 앞섰고, 독일의 통제경제 인프라는 히틀러보다 앞섰고, 영국의 관세 전환은 오타와보다 넉 달 앞섰다. “관세가 블록을 만들고 블록이 전쟁을 만들었다”는 깔끔한 도미노는 실제 기록과 맞지 않는다.
둘째, 블록 체제는 축적된 것이다. 1931년의 외환통제는 은행을 살리려는 응급조치였고, 1936년의 4개년 계획은 전쟁 준비였다. 같은 도구가 5년 사이에 성격을 바꿨다. 도구를 처음 꺼낼 때 아무도 그 끝을 예상하지 않았다.
셋째, 블록 안에서 약한 참여자는 위치를 배정받는다. 조선의 경험이 그것이다. 공장은 들어섰지만 그 공장이 무엇을 만들지는 다른 데서 정해졌다.
그렇다면 이 흐름을 되돌릴 기회는 없었을까. 있었다. 미국은 1934년에 이미 관세를 낮추기 시작했고, 1936년에는 통화 협조까지 복구됐다. 그런데 블록은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전쟁까지 갔다.
왜 되돌리기가 실패했는지 — 그것이 3편의 주제다. 1935년 이탈리아 제재와 1941년 대일 석유 금수라는 두 실험을 통해, 그리고 2026년의 관세·희토류 통제와 나란히 놓고 보겠다.
시리즈 안내
- 1편 — 대공황의 진짜 범인은 관세가 아니었다
- 2편(이 글) — 블록경제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 3편 — 제재는 왜 실패하는가: 1941년과 2026년
이 글은 특정 종목·자산에 대한 투자 조언이 아니다. 공개된 역사 연구와 통계를 바탕으로 한 해설이다.
참고 자료
- British Empire Economic Conference — Wikipedia — 1932년 7월 21일~8월 18일 오타와 회의, 9개 대표단, “본국·제국·외국” 원칙, 거국내각 분열
- Abnormal Importations (Customs Duties) Act 1931 — Wikipedia — 1931년 11월, 최대 100% 관세 부과 권한
- Import Duties Act 1932 — Wikipedia — 1932년 2월 29일 국왕 재가, 3월 1일 시행, 일반관세 10%, 자치령 11월 15일까지 면제 — 그 시한이 오타와 협상 기한
- Gold standard — Wikipedia — 영국 1931년 9월 19일 이탈, 독일·오스트리아 1931년 7~10월
- Hjalmar Schacht — Wikipedia — 1934년 9월 ‘신계획’과 마르크 결제 구조
- London Economic Conference — Wikipedia — 1933년 6월 12일~7월 27일, 66개국, 루스벨트의 폭탄 선언
- 흥남시 — 위키백과 — 1927년 노구치의 조선질소비료·부전강 발전소, 600만 평 단지, 중일전쟁 이후 군수 전환
- 우리역사넷 — 농공 병진 정책 — 우가키 총독의 일선만 블록 분업 구상
- NBER — David S. Jacks & Dennis Novy, Trade Blocs and Trade Wars during the Interwar Period (2019) — 무역전쟁이 이미 진행 중이던 블록 형성을 가속시켰다는 계량 분석
댓글
✍️ 편집자 모드 — 이 댓글은 공개되지 않고 편집자에게만 전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