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서 관세는 대공황의 주범이 아니었다고 했고, 2편에서 블록 하나하나는 설계였지만 블록 체제는 축적이었다고 했다. 남은 질문은 하나다.
되돌릴 수는 없었나.
있었다. 미국은 스무트-홀리 시행 4년 만인 1934년에 관세를 되돌리기 시작했고, 1936년에는 통화 협조까지 복구됐다. 그런데 블록은 사라지지 않았고, 3년 뒤 전쟁이 났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 편은 그 실패를 다룬다. 1930년대에는 경제적 압박을 무기로 쓴 두 번의 큰 실험이 있었다. 1935년 이탈리아 제재는 너무 헐거워서 실패했고, 1941년 대일 석유 금수는 너무 잘 들어서 전쟁을 앞당겼다. 둘 다 실패인데 실패한 방향이 정반대였다.
그리고 2026년 지금, 우리는 같은 도구를 다시 쓰고 있다. 다만 올해 벌어진 일 하나가 이 비유를 흥미롭게 만든다.
이미지: Ken Lund from Reno, Nevada, USA · Wikimedia Commons · CC BY-SA 2.0
1935년 이탈리아 — 반쯤 드는 칼이 가장 나쁘다
1935년 10월,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국제연맹은 10월 7일 이탈리아를 침략자로 규정하고 경제제재 절차에 들어갔다. 집단안보 체제가 실제로 작동한 첫 대규모 사례였다.
왜 이것이 ‘첫’ 사례였는지부터 짚어야 한다. 4년 전 만주에서 연맹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리튼 조사단이 1932년 10월 2일 보고서로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았고 총회는 이듬해 2월 일본만 반대한 가운데 이를 채택했지만, 강대국들은 경제제재를 규정한 규약 제16조를 끝내 발동하지 않았다. 일본은 그다음 달 탈퇴를 통고하고 만주에 그대로 남았다. 1935년에 연맹이 이탈리아를 상대로 뭐라도 해 보려 한 배경에는 이 완전한 무위의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제재의 내용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 항목 | 처리 |
|---|---|
| 무기·차관 | 금지 |
| 석유 | 제외 |
| 철강 | 제외 |
| 수에즈 운하 통행 | 차단하지 않음 |
| 미국(비회원) | 참여 안 함, 오히려 대이탈리아 수출 증가 |
출처: Abyssinia Crisis, Wikipedia
전쟁을 하려면 석유가 필요하다. 그 석유가 제재 목록에서 빠졌다. 이탈리아 군대가 홍해로 가려면 수에즈를 지나야 하는데, 운하를 관리하던 영국은 막지 않았다. 그리고 국제연맹 회원국이 아니었던 미국은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탈리아로 가는 수출을 오히려 늘렸다.
왜 이렇게 무디게 했을까. 흔히 무능이나 우유부단으로 설명되지만, 실제로는 계산이 있었다. 그해 4월 영국·프랑스·이탈리아는 스트레사에서 독일을 견제하려고 손을 잡았다. 그 전선은 6월 영독 해군협정으로 이미 금이 갔지만, 프랑스는 여전히 대독 견제를 위해 이탈리아를 붙잡아 두려 했다. 이탈리아를 세게 때리면 독일 쪽으로 밀어 넣는다는 걱정이었다. 12월에는 에티오피아를 분할해 상당 부분을 이탈리아에 넘기는 호어-라발 협정까지 몰래 만들었다가 언론에 유출돼 영국 외무장관과 프랑스 총리가 정치적 대가를 치렀다.
즉 1935년에 제재를 무디게 만든 브레이크는 ‘제3국 견제’라는 전략적 계산이었다. 이 점을 기억해 두자. 2026년에 제재를 무디게 만드는 브레이크는 종류가 다르다.
결과는 예상 가능했다. 1936년 5월 5일 이탈리아군이 아디스아바바를 함락했고, 7월 15일 제재는 해제됐다. 에티오피아는 지켜지지 않았다.
더 나쁜 것은 부작용이었다. 제재는 이탈리아의 방향을 바꿔 놓았다. 이탈리아는 경제적·군사적 지향을 독일 쪽으로 돌렸고, 무솔리니 정권은 “세계가 우리를 괴롭힌다”는 서사로 국내 지지를 오히려 끌어올렸다. 독일로 밀어 넣지 않으려던 계산이 정확히 그 결과를 낳았다.
첫 번째 교훈. 효과 없는 제재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 상대에게 실질적 타격은 못 주면서, 상대가 진영을 정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1941년 일본 — 이번엔 칼이 너무 잘 들었다
6년 뒤, 정반대 사례가 나온다.
일본은 석유의 80% 이상을 미국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그 상태로 1931년 만주로, 1937년 중국 본토로 들어갔다. 미국의 대응은 단계적이었고, 1941년에 결정적으로 바뀐다.
여기서 흔히 잘못 알려진 대목이 있다. 순서를 정확히 보자.
| 날짜 | 사건 |
|---|---|
| 1940년 | 미국, 고철·항공유 등 부분 금수 |
| 1941년 7월 2일 | 어전회의 「정세 추이에 따른 제국 국책 요강」 채택 — 남방 진출을 추진하되 “대영미전을 마다하지 않는다(辞せず)“는 문안. 같은 문서에 대소련 무력 준비도 병기돼 있어, 개전 결정이 아니라 선택지를 열어 둔 문서다 |
| 1941년 7월 24일 | 일본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 비행장 점거 |
| 1941년 7월 26일 | 루스벨트, 미국 내 일본 자산 전면 동결 |
| 1941년 7월 28일 |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 개시 |
| 1941년 8월 1일 | 석유·휘발유 수출 금수 |
| 1941년 9월 6일 | 어전회의 「제국 국책 수행 요령」 — 외교가 실패하면 개전 준비 |
| 1941년 11월 26일 | 미국, 헐 노트 전달 — 중국·인도차이나 철수 시 자산 동결 해제·통상 재개 |
| 1941년 12월 1일 | 어전회의, 대미·영·네덜란드 개전 결정 |
| 1941년 12월 8일 | 진주만 공격 |
출처: 御前会議 · Events leading to the attack on Pearl Harbor · Hull note, Wikipedia
7월 2일이 7월 26일보다 앞선다. 이 한 줄이 중요하다.
일본이 남방 진출 방침을 어전회의에서 채택한 것은 자산 동결보다 3주, 석유 금수보다 한 달 앞선다. 즉 석유 금수 하나가 전쟁을 만들었다는 설명은 성립하지 않는다. 방향은 이미 잡혀 있었다.
다만 여기서도 과장하면 안 된다. 7월 2일 문서의 문안은 “전쟁을 마다하지 않는다”이지 “전쟁을 한다”가 아니고, 같은 문서에 소련을 상대로 한 무력 준비도 함께 담겨 있었다. 실제로 그달 관동군 특종연습(관특연)이 발동됐다. 그 시점에 경로는 아직 잠기지 않았다. 게다가 미국의 부분 금수(1940년 고철·항공유)는 7월 2일보다 앞선다. 압박과 결정은 서로를 밀고 당기며 진행됐지, 한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런데 정반대 결론으로 건너뛰어도 안 된다. 금수는 시점을 결정했다.
석유 비축은 유한하다. 금수가 걸린 순간부터 일본군 지도부의 계산은 이렇게 바뀐다. “지금 싸우면 비축유로 버틸 수 있다. 1년 뒤에 싸우면 비축유가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지는 구조가 만들어지면, 협상을 기다리는 것 자체가 손해가 된다.
두 번째 교훈이 여기서 나온다. 잘 드는 제재는 상대의 시계를 앞당긴다. 상대에게 “기다릴수록 불리하다”는 계산을 심어 주면, 제재는 충돌을 막는 대신 충돌을 재촉하는 장치가 된다.
1935년과 1941년을 나란히 놓으면 제재의 딜레마가 그대로 보인다. 헐거우면 적을 만들기만 하고, 단단하면 시계를 앞당긴다. 그 사이 어딘가에 답이 있다면, 그 답은 제재의 강도가 아니라 상대에게 남겨 둔 출구에 있다.
1934년, 미국은 이미 되돌리고 있었다
이제 이 시리즈의 핵심 논점이다.
1934년 6월 12일, 루스벨트가 **호혜통상협정법(RTAA)**에 서명했다. 관세를 정하는 권한을 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옮기고, 상대국과 협상해 서로 낮추는 방식으로 바꾼 법이다.
제도적으로는 성공했다. 1934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은 27개국과 32건의 협정을 맺었고, 평균 관세율은 1934년 46%에서 1962년 12%까지 내려갔다. (다만 이 하락에는 종량세 구조 때문에 물가가 오르면 실효세율이 저절로 내려가는 효과도 섞여 있다.) 이 법의 권한으로 GATT가 체결됐으니, 오늘날 WTO 체제의 뿌리이기도 하다.
RTAA의 진짜 교훈은 세율이 아니라 권한의 소재에 있다. 스무트-홀리가 가능했던 이유는 관세가 지역구 표 계산의 산물이었기 때문이고, RTAA가 관세를 내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 계산에서 관세를 떼어 냈기 때문이다. 즉 1930년대가 남긴 제도적 교훈은 “자유무역이 옳다”가 아니라 **“보호주의는 특정한 의사결정 구조에서 자동으로 자라난다”**는 것이다. 뒤에서 보겠지만 2026년에 눈여겨볼 대목이 정확히 여기다.
되돌린 것은 관세만이 아니었다. 1편에서 무역 붕괴의 주범으로 지목한 금본위제 문제도 정리됐다. 1936년 9월 미국·영국·프랑스가 삼국통화협정을 맺고 프랑스가 평가절하하면서 금블록은 해체됐고, 벨기에·스위스·네덜란드가 뒤따르며 1931년부터 이어진 통화 전쟁이 끝났다.
그런데 세계 무역은 회복되지 않았다. 그리고 통화 협조가 복구된 바로 그해 가을, 독일은 4개년 계획을 공표했다.
주범을 제거했는데도 결과가 남았다. 이것이 이 시리즈에서 가장 불편한 사실이다.
- 제국특혜관세는 그대로 유지됐다
- 독일의 자립경제 노선은 1936년 4개년 계획으로 오히려 제도화됐다
- 일본의 엔블록은 1937년 이후 병참기지 체제로 강화됐다
- 1939년 전쟁이 났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나. 답은 2편에서 본 축적 구조에 있다. 1931년의 외환통제는 은행을 살리려는 경제 조치였다. 1936년의 4개년 계획은 전쟁을 준비하는 안보 조치였다. 같은 도구인데 목적이 바뀌었고, 목적이 안보로 바뀐 뒤에는 경제적 유인으로 되돌릴 수 없다.
정책은 5년이면 되돌린다. 인식은 한 세대가 걸린다. 물론 이건 법칙이 아니라 이 시기가 보여 준 경향이다. 실제로 통화 협조는 5년 만에 복구됐지만, 오타와의 제국특혜는 1973년 영국이 유럽공동체에 들어갈 때까지 남았다. 갈린 지점은 경제냐 인식이냐가 아니라, 그 조치가 안보 논리 안으로 들어갔느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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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 올해 벌어진 일이 비유를 흔들었다
이제 지금을 보자. 그런데 2026년의 관세 이야기를 하려면 올해 2월을 먼저 짚어야 한다.
2026년 2월, 미국 연방대법원은 Learning Resources, Inc. v. Trump 사건에서 6대 3으로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이 대통령에게 관세 부과 권한을 주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그때까지 33만 개 넘는 기업에서 걷은 약 1,660억 달러를 환급해야 한다는 결정이 뒤따랐다.
행정부는 무역확장법 제122조를 근거로 150일 한시의 보편관세 10~15%를 대신 걸었으나, 이 조치 역시 국제무역법원(CIT)에서 위법 판단을 받고 항소 중이다. 이후에는 통상법 제301조를 근거로 한 개별 조치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 사건이 이 시리즈에 던지는 함의는 두 겹이다.
앞서 RTAA의 교훈이 “권한의 소재”라고 했다. 1934년에는 관세 권한이 의회에서 행정부로 넘어가면서 관세가 내려갔다. 2026년에는 같은 권한 집중이 관세를 올리는 방향으로 작동했다. 같은 제도 설계가 정반대 결과를 냈다. 관건은 누가 권한을 쥐느냐가 아니라, 권한을 쥔 쪽이 어떤 유권자에게 답하느냐였던 셈이다.
그리고 두 번째. 1930년대에는 관세 폭주를 안에서 멈출 장치가 사실상 없었다. 스무트-홀리를 막은 것은 경제학자 1,028명의 성명이 아니라 4년 뒤의 다른 법이었다. 2026년에는 법원이 먼저 멈춰 세웠다. 이 차이는 “1930년대의 반복”이라는 비유를 상당히 약화시킨다.
무기는 관세에서 수출통제로 옮겨 갔다
관세의 법적 지위가 흔들리는 동안, 실제 무게중심은 다른 쪽으로 옮겨 갔다. 그때는 금수(embargo)였고 지금은 수출통제(export control)다.
특히 중국의 희토류 통제가 그렇다. 2025년 4월 중국은 중희토류 6종과 희토류 자석 수출을 제한했고, 그해 10월에는 특정 수출 사업자에 대해 재수출까지 허가 대상으로 삼는 역외 관할을 도입했다. 이후 정상회담을 계기로 이 제한은 1년간 유예됐다.
미국이 반도체 장비로, 중국이 희토류로 서로의 목을 쥔 구도다. 다만 여기서 1935년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다. 1935년에 제재를 무디게 만든 브레이크는 ‘이탈리아를 독일에 뺏길라’는 전략적 계산이었다. 2026년에 통제를 무디게 만드는 브레이크는 ‘내 발등을 찍는다’는 경제적 계산이다. 중국이 희토류를 완전히 잠그면 중국 수출기업과 그 고객이 함께 무너진다. 다만 이 브레이크도 완전하지는 않다. 유예에 합의한 뒤에도 2026년 7월 기준 대미 희토류 자석 수출은 2022~24년 평균을 20% 밑돌았다. 합의는 있었으나 실물은 돌아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브레이크의 종류가 다르다는 것은 중요하다. 전략적 브레이크는 정세가 바뀌면 사라진다. 실제로 스트레사 전선은 1935년 10월 침공으로 이미 무너졌고, 이듬해 2월 무솔리니는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제재가 효력을 내기도 전에 브레이크가 먼저 사라진 것이다. 경제적 브레이크는 공급망을 실제로 끊어 내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는다. 대신 그렇기 때문에 양쪽 모두 조용히 공급망을 갈아 끼우는 작업을 하고 있고, 그 작업이 끝나면 브레이크도 함께 사라진다.
닮은 것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
여기까지만 보면 “1930년대의 반복”이라는 말이 그럴듯하다. 절반은 맞다.
닮은 것 세 가지
- 순서가 같다. 관세 → 보복 → 블록화. 그때 2년 걸린 일이 비슷한 속도로 진행 중이다.
- ‘못 가진 나라’의 논리가 같다. 그때는 석유·고무·철이었고 지금은 희토류·반도체다. 대상만 바뀌었다.
- 경제 조치가 안보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 관세와 수출통제가 산업정책이 아니라 안보 수단으로 다뤄진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다른 것도 있다.
| 1930년대 | 2026년 | |
|---|---|---|
| 자원 확보 대안 | 대안은 있었으나 정치적으로 배제됨 | 대체 공급망 구축 가능 (5~10년) |
| 전면전 비용 | 감당 가능하다고 계산됨 | 핵으로 계산 불가 |
| 제재의 반작용 | 약함(경제적) / 전략적 형태로 존재 | 강함 (상호 취약) |
| 국제 제도 | 국제연맹은 있었으나 작동하지 않음 | 약해졌으나 존재 |
| 국내 견제 | 사실상 없음 | 법원이 실제로 제동 |
가장 큰 것이 첫 줄인데, 여기서 흔한 결정론을 조심해야 한다. 1941년 일본에게 자원을 얻을 길이 물리적으로 침공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해 11월 26일 미국이 건넨 헐 노트는 중국과 인도차이나에서 물러나면 자산 동결을 풀고 통상을 되살리겠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이 그 길을 고르지 않은 이유는 석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4년간 치른 중국 전쟁을 접을 수 없어서였다. 대안을 지운 것은 지질이 아니라 정치였다.
그러니 네덜란드령 동인도(오늘날 인도네시아)의 유전을 “침공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다. 정확히는 교섭이 결렬된 뒤, 그들의 정치 일정 안에서 쓸 수 있는 수단이 무력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체 공급망을 5~10년이면 짓는다”는 답도 그 자체로는 안심의 근거가 못 된다. 관건은 대안이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결정을 내리는 쪽이 그 대안을 자기 정치 일정 안에서 쓸 수 있는 것으로 보느냐다. 1941년의 일본에게도 대안은 존재했지만, 그들의 시간표 안에는 없었다.
한국은 어디에 서 있나
2편에서 봤듯 1930년대의 조선은 블록 분업표의 한 칸을 배정받았다. 선택권이 없었다.
2026년의 한국은 다르다. 선택권이 있다. 다만 조건이 만만치 않다.
한국은 희토류를 전량 수입에 의존한다. 전기차와 풍력에 필수적인 네오디뮴 영구자석의 경우 대중국 수입 비중이 88.0%로 집계된 바 있다(한국무역협회, 2021년 6월). 5년 전 수치이니 그동안 다변화가 진행됐을 수 있지만, 여기에 함정이 하나 있다.
최종 가공국이 바뀌었다고 원산지까지 다변화된 것은 아니다. 새로운 공급국이 통계에 등장해도, 그 나라의 원광 채굴과 제련이 여전히 중국 공급망에 연결돼 있을 수 있다. 장부상 의존도는 내려가는데 실제 취약성은 그대로인 상황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 지점에서 90년 전과 지금이 겹친다. 그때 조선은 블록 안에서 위치를 배정받았고, 지금 한국은 두 블록 사이에서 위치를 협상해야 한다. 협상할 수 있다는 것이 결정적 차이다. 다만 협상력은 결국 대체 가능성에서 나온다. 대체할 수 없는 것을 들고 협상 테이블에 앉으면 그건 협상이 아니다.
결론 — 지켜볼 것은 관세율이 아니다
세 편을 정리하면 이렇다.
1. 관세가 대공황을 만든 것은 아니다. 관세가 걸린 건 미국 수입의 3분의 1이었고, 무관세 품목도 똑같이 무너졌다. 주범은 금본위제였다.
2. 블록 하나하나는 설계였지만 블록 체제는 축적이었다. 만주사변은 오타와보다 앞섰고, 독일의 통제 인프라는 히틀러보다 앞섰다. 각자의 설계를 합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 전쟁으로 간 이유는 대안이 없어서가 아니라 대안이 배제됐기 때문이다. 헐 노트는 존재했다. 일본이 그것을 고르지 못한 것은 지질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였다.
4. 되돌리기는 실패했다. 미국은 1934년에 관세를 낮췄고 1936년에는 통화 협조까지 복구했다. 그런데도 블록과 자립경제 논리는 남았고 결국 전쟁까지 갔다. 한 번 “이건 안보 문제”가 되면 비용-편익 계산이 작동을 멈추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지켜볼 것은 관세율이 몇 퍼센트냐가 아니다. 경제 조치가 안보 언어로 번역되는 속도다.
다만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야 한다. 번역은 세계 전체에서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 1936년 9월 한 달 안에, 한쪽에서는 미국·영국·프랑스가 통화 협조를 복구했고, 다른 쪽에서는 독일이 4개년 계획을 공표하며 자립경제를 안보 체제로 굳혔다. 세계가 통째로 안보화된 게 아니라 안보화된 축과 그렇지 않은 축으로 갈라진 것이다.
2026년도 같다. 미중 사이는 안보화됐지만 그 밖의 무역은 여전히 경제 논리로 돈다. 그러므로 관찰 지표는 “안보 언어가 등장했는가”가 아니라 **“안보 축에 몇 나라가 들어와 있는가”**여야 한다. 1930년대에 결정적이었던 것은 독일·일본·이탈리아가 안보 축으로 넘어간 사실이 아니라, 넘어가지 않은 나라들이 그들을 붙잡을 수단을 잃었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이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정확히 그 지점이다. 안보 축에 완전히 들어가지도, 완전히 벗어나 있지도 않은 자리. 90년 전 조선과 다른 점은 그 자리를 스스로 협상할 수 있다는 것이고, 같은 점은 협상 재료를 스스로 만들지 않으면 결국 배정받는다는 것이다.
시리즈 안내
- 1편 — 대공황의 진짜 범인은 관세가 아니었다
- 2편 — 블록경제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 3편(이 글) — 제재는 왜 실패하는가
이 글은 특정 종목·자산에 대한 투자 조언이 아니다. 공개된 역사 연구와 정책·시장 정보를 바탕으로 한 해설이며, 인용된 수치는 각 출처의 발표 시점 기준이다.
참고 자료
- Abyssinia Crisis — Wikipedia — 1935년 10월 7일 침략자 규정, 석유·철강 제외, 미국의 대이탈리아 수출 증가, 1936년 7월 15일 해제
- Stresa Front — Wikipedia · Hoare–Laval Pact — Wikipedia — 제재를 무디게 만든 전략적 계산
- Lytton Report — Wikipedia — 1932년 10월 2일 보고서, 1933년 2월 24일 총회 채택, 제재 무산
- 御前会議 — 일본어 위키백과 — 1941년 7월 2일·9월 6일·12월 1일 어전회의 결정 내용
- Events leading to the attack on Pearl Harbor — Wikipedia — 7월 24일 비행장 점거, 7월 26일 자산 동결, 8월 1일 석유 금수, 대미 석유 의존도
- Hull note — Wikipedia — 1941년 11월 26일 미국 제안 내용
- Reciprocal Tariff Act — Wikipedia — 1934년 6월 12일 서명, 27개국 32건 협정, 평균 관세 46%(1934)→12%(1962), GATT와의 관계
- Tripartite Agreement of 1936 — Wikipedia — 1936년 9월 통화 전쟁 종결, 그러나 세계 무역 회복 실패
- Tariffs in the second Trump administration — Wikipedia — 2026년 2월 대법원 IEEPA 판결, 1,660억 달러 환급, 122조 보편관세와 CIT 판단
- China–United States trade war — Wikipedia — 2025년 희토류 수출 제한과 유예 경위
- KDI 경제정보센터 — 우리나라와 주요국의 희토류 공급망 현황 — 한국무역협회(2021.6) 네오디뮴 영구자석 대중 의존도 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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