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7일, 정부가 신규 원전 부지 두 곳을 공식 확정했다. 경북 영덕에는 대형 원전 2기, 부산 기장에는 국내 최초 SMR(소형모듈원자로)이 들어선다. 마지막 신규 부지 결정이 2012년이었으니 14년 만의 일이다. 숫자만 보면 그냥 에너지 정책 뉴스 같지만, 타이밍을 보면 다른 이야기가 읽힌다.
왜 하필 2026년인가. 그리고 왜 SMR은 기장인가. 이 두 질문에 답하면 한국 에너지의 다음 30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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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2026년인가 — 14년 공백을 깬 세 가지 압력
원자력 부지 결정이 이렇게 오래 묶여 있었던 건 후쿠시마(2011) 이후의 반핵 여론과 탈원전 정책 기조 때문이었다. 그 기조가 뒤집힌 데는 세 가지 힘이 동시에 작용했다.
첫째, AI가 전기를 먹기 시작했다. IEA에 따르면 글로벌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는 2026년 1,000TWh에 달할 전망이다. 일본 전체의 연간 전력 소비와 맞먹는 규모가 데이터센터에서만 나온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현재 국내 AI 데이터센터 용량은 725MW지만, 계획 중인 시설까지 합산하면 1.2GW를 넘어 싱가포르를 추월할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이 수요가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재생에너지가 아니라 ‘24시간 365일 안정적인’ 전기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태양광은 밤에 안 된다. 풍력은 바람이 없으면 안 된다. 원전은 된다.
둘째, 글로벌 원전 재평가가 정책 정당성을 제공했다. 벨기에는 탈원전 계획을 철회했고, 이탈리아는 원전 재도입을 선언했으며, EU는 원전을 ‘녹색 분류체계(Green Taxonomy)‘에 포함시켰다. “원전은 구시대”라는 논리가 국제적으로 힘을 잃으면서 한국의 정책 방향 전환도 명분을 얻었다.
셋째, 전력 수요 성장이 가시화됐다. 한국의 수도권 전력 자립도는 11.6%에 불과하다. 반도체 공장, 데이터센터, 전기차 충전 인프라가 몰리는 수도권이 사실상 전력 수입 지역이라는 뜻이다. 기존 원전·가스 발전소를 줄이면서 수요는 늘어나는 구조를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이 세 압력이 겹쳐 14년의 공백이 깨졌다.
영덕과 기장, 각자의 전략적 역할
두 부지는 역할이 다르다.
경북 영덕은 대형 원전 2기를 유치한다. 부지 심사에서 91.01점을 받아 최종 선정됐다. 예상 투자액은 12조 원이며 준공 목표는 2037~2038년이다. 동해안 입지는 냉각수 확보에 유리하고, 지역 수용성도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었다. 영덕이 담당하는 역할은 단순명쾌하다. ‘기저 발전 증설’ — 수십 년간 안정적으로 대용량 전기를 공급하는 것이다.
부산 기장은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87.11점으로 선정된 이 부지에 들어서는 건 국내 최초 SMR이다. 준공 목표는 2035년으로 영덕보다 2~3년 앞선다.
기장이 SMR 부지로 낙점된 데는 이유가 있다. 기장 인근에는 이미 고리·새울 원전 단지가 있다. 원전 관련 인프라(인력, 부품 공급망, 규제 경험, 지역 수용 문화)가 밀집한 곳에 SMR을 짓는 건 상당히 합리적 선택이다. 새로운 지역에 ‘처음 보는 원자로’를 짓는 것보다 이미 원전이 익숙한 지역에 짓는 편이 인허가와 수용성 양쪽에서 유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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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R 선두다툼 — 중국 링롱원이 기장 일정을 왜 압박하는가
SMR은 단순한 ‘작은 원전’이 아니다. 차세대 원전 수출의 핵심 카드다.
중국은 세계 최초 상업용 육상 SMR인 ‘링롱원(玲龍一號, 125MW)‘을 하이난성에 건설 중이며 2026년 상반기 상업운전을 목표로 하고 있다. 만약 링롱원이 먼저 상업 운전에 성공하면 중국은 ‘SMR 상업 운전 실적’을 들고 글로벌 원전 수출 시장에 뛰어들 수 있다. 수출입은행의 금융 지원과 결합하면 가격 경쟁에서 한국이 밀릴 수 있다.
한국은 체코 원전 수출에서 웨스팅하우스와 손을 잡고 APR1400을 앞세우고 있다. 대형 원전 수출 실적은 이미 있지만, SMR 수출 실적은 아직 없다. 기장 SMR이 2035년 준공되면 한국은 실증 모델을 갖고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있다. 반대로 늦어지면 중국이나 미국 뉴스케일(NuScale), 영국 롤스로이스에 선점을 허용하게 된다.
2035년이라는 기장의 목표 준공 시점은 이 경쟁을 염두에 둔 숫자라고 봐도 무방하다.
2035~2038년 준공까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
신규 원전 부지가 확정됐다고 해서 당장 뭔가 달라지는 건 없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더 복잡하다.
환경영향평가, 건설허가, 부지 정비, 실제 착공까지는 통상 10년 안팎이 걸린다. 준공 목표가 2035~2038년인 이유가 여기 있다. 그 사이에 정권이 바뀌면 정책이 흔들릴 수 있다는 리스크도 상존한다. 2012년 이전에도 부지 결정이 있었지만 이후 정책 변화로 사실상 중단된 선례가 있다.
지역 주민 수용성도 변수다. 영덕은 상대적으로 수용 분위기가 형성됐다는 평가지만, 대규모 공사와 지역 개발 약속 이행 여부에 따라 갈등이 불거질 수 있다. 기장은 기존 원전 문화가 있지만 SMR이라는 새로운 형태에 대한 주민 설명과 합의가 별도로 필요하다.
재정 측면에서는 영덕 한 곳에만 12조 원이 들어간다. 정부가 직접 시공하는 구조(한국수력원자력)이지만, 천문학적 비용은 결국 전기요금이나 국가 재정에 영향을 준다. 전기요금 인상 압력을 어떻게 관리할지는 정책 당국의 숙제다.
그럼에도 이번 결정의 의미는 분명하다. 한국은 ‘원전 확대’를 에너지 전략의 공식 경로로 선택했다. AI 시대의 전력 수요를 태양광·풍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현실 인식과, SMR을 통해 차세대 수출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의지가 동시에 반영된 결정이다. 2035년 기장 SMR 준공일이 한국 에너지 산업의 다음 10년을 가늠하는 기준점이 될 것이다.
이 글은 공개된 정책 발표와 언론 보도를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 투자 조언이 아니며, 에너지 정책은 정권·여건에 따라 변동될 수 있습니다.
출처: 전자신문 (2026.06.17), 파이낸셜뉴스 (2026.06.17), 한국경제 (2026.06.17), IEA 데이터센터 전망 보고서, WEF 에너지 전환 지수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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